[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그냥 좋음과 구체적 좋음

입력 2023-09-13 17:44   수정 2023-09-14 00:25

책방에서 시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h님이 물었다. “그런데 그냥 좋은 게 정말 좋은 거 아닌가요?” h님은 좋은 데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순간 마음이 이상해진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좋다고 말하는 순간 순수하게 좋았던 마음이 얼마간 손상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냥 좋은 건 너무 싱겁지 않은가. “저는 그냥 좋다고 말하는 사람에겐 서운함을 느껴요.” 조금 다른 마음도 있다는 걸 알고는 h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냥 좋다’는 말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참이었다. 비슷하게 다정한 사람들 마음속에 이렇게나 다른 심리 기제가 작용하고 있는데도 서로의 마음을 살피며 함께 시를 읽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러웠다. 다름을 이야기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어서 나는 계속 말했다. “저는 이유 없이 좋았지만 대답해주고 싶어서 이유를 소급 적용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성의를 느끼거든요. 열심히 자기 마음을 뒤적이다가 찾고 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설레기도 하고요.”

좋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수원에 있는 갤러리 소현문을 생각했다. 소현문에선 유현아 시인의 시집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의 표지 그림을 그린 김민주 작가가 참여한 전시 ‘수요일 수요일’이 열리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그의 그림에 사로잡혔던 한 시인의 낭독회를 한 것이다. 낭독회 좋은 줄은 진작 알았지만 이번 낭독회는 특히나 좋았다. 누군가 내게 왜냐고 묻는다면, 나도 h님처럼 “그냥”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역시나 입이 근질거리는 타입이라 말하겠다. 소현문에서 있었던 낭독회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구체적 좋음’을 이야기하는 관객들로 가득해서였다. 시인이 시를 낭독하고 시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여기저기서 작게 감탄이 터졌다. 낭독회가 끝나갈 즈음, 우리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각자가 느낀 좋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관객 중에는 미술 작업을 하는 분들이 특히 많았다. 작업을 하다가 왔다는 한 분은 낭독회가 처음인데 다시 작업할 힘을 얻었다고 했다. 한 시간이 넘는 낭독회를 어떻게 견딜까 싶었는데 금방 시간이 지났다며 놀라워하는 사람, 시 속에 나온 조각 땅을 팔지 않는 조각가 이야기에 마음을 쓰는 사람, 그림들이 함께 시를 듣고 있는 듯했다는 사람, 시를 들으러 왔는데 김아라 작가의 단청 작품에 반했다는 사람…. 다들 각자만의 이유로 좋음을 이야기한 시간이 벌써 그리워진다. 이런 내 마음까지도 전시 기획자의 계획에 포함된 건 아닐까? 그림과 그림이 만나고 다시 시와 그림이 만나는 시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영감이 되었기를 바랐다.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바뀌고 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을을 마중 나가고 있었던 걸까? 가을이 그냥 좋다.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들이 익어가고 있으니까 좋다. 사과를 깎으면 “즐거운 노래”(‘사과 깎기’, 서정춘)가 나온다고 믿는 시가 눈에 들어와서 좋다.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나오는 나락들”(‘잘 익은 사과’, 김혜순)이 있어 좋다.

좋음에 대해서라면 나는 여전히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다. 죽어서 입만 동동 뜬다고 해도 좋다. 좋음이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 알처럼 풍성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 한 적 있는 사람? “내가 좋은 이유 10가지 말해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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